3장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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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가르침을 구하는 용담숭신 화상에게 천황 선사가 이르렀다.
    ‘ 당신이 이곳에 온 이후 나는 마음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다. 당신이 차를 들고 오면 당신을 위해 받았고, 음식을 날라 오면 당신을 위해 받았다. 나에게 인사를 할 때에는 나는 곧 머리를 숙였으니, 어떤 점에서 당신에게 마음의 요체를 가르치지 않았다 할 수 있는가?'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며 마음 한구석이 무척 뜨끔했다. 그 모든 자잘한 행동들 눈빛들 표정들 모두가 ‘그대를 위해’ 지은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면 어찌 깨닫지 못하겠는가. 책 한 권을 읽을 때 ‘가장 멋진 구절’을 고르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글 한 편을 쓸 때도 ‘되도록이면 아름다운 문장’을 써보겠다고 골머리를 앓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중한 가르침은 어떤 눈부신 하이라이트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인생에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이 없다.
    모든 것이 발단이고, 모든 것이 절정이며, 모든 것이 결말이다. 이별은 사랑의 결말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의 시작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별함으로써 그 사람과의 더 커다란 인연을 만들어 가는 도정의 시작일 수 있다. 생명의 탄생 또한 그렇다. 탄생은 시작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이별의 암시다. 우리는 탄생하는 순간 가장 사랑하는 것들과의 이별을 예약해 놓는 셈이다. 그 예약은 100퍼센트 지켜진다.
    사랑하는 것들과 이별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직지』는 이렇듯 지극히 짧은 문답 속에서 우리 삶의 전체를 꿰뚫는‘마음의 맥박’을 잡아보게 만든다. 내 가슴을 제대로 뛰고 있는가. 이미 오래전에 멈춰버린 것은 아닌가. 내 사랑은 실은 나 자신을 위한 이기심이나 초라한 변명은 아니었던가.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한사코 거부하면서 어떻게든 그 사랑의 동아줄을 앙칼지게 틀어쥐려는 소유욕은 아니었던가. 일에 대한 내 사랑이야말로 그렇지 않았던가. 일을 통해 나를 증명하려는 욕심은 모든 부주의를 정당화하지 않는가. 일을 한답시고, 더 좋은 성과를 내어야 한답시고, 내 곁의 사람들을 외롭게 하지는 않았는가.
    삶의 매 순간이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우리는 용맹정진해야 한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도 운명의 여신은 우리를 배신하기 일쑤다.
    문제는 실패하지 않는 비결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도, 성공에서도 ‘ 사심’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순간, 모든 곳에서 배우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강의를 할 때만 열심히 듣고 시험을 볼 때만 열심히 공부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의 몸짓 하나하나, 그 사람의 말투 하나하나에서 진심으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관계야말로 그 어떤 우정이나 사제관계보다도 돈독한 인연일 것이다. (정여울)
  • 2 옛 책에서는 본문의 내용을 보충하여 설명하고자 할 때, 그 행의 마지막에 본문글자보다 작은 활자를 삽입했다. 보통 이러한 것을 ‘협주 夾註’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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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관계지한 선사가 임종을 앞두고 제자에게 물었다.
    “앉아서 죽은 사람이 있는가?”, “서서 간 사람이 있는가?” 제자가 이미 그런 선사가 있다고 대답하자 일곱 걸음을 걷고 숨을 거두었다.
    수행자는 죽음을 맞이할 때 생애의 비밀이 드러난다. 철저한 수행을 거친 이는 죽음 앞에서 망설이거나 초조해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순간에 거쳐온 삶의 진면목이 공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효봉스님의 일대기에서 열반을‘장엄한 낙조’라고 표현했으며, 성철스님은 열반송에서‘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라며 당신이 떠나는 순간을 아름다운 낙조에 비유했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의 그 모습이 거룩한 불사가 되려면 적어도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을 살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어영부영하다가는 마지막을 준비할 새도 없이 저승사자와 면담할지도 모른다.
    내가 살고 있는 근처의 천주교 묘지의 정문 뒷면에는‘오늘은 내 차례, 내일은 네 차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어 곱씹어 보게 된다. 무덤의 주인공은 먼저 간 사람이고, 살아 있는 우리들은 그 뒤를 따를 사람들. 결국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모두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평생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착각하지 말 것이며, 숨 쉬고 있을 때 시간 낭비 말고 뜻있는 인생을 살아달라는 그들의 부탁인 것이다. 나는 이 글귀를 대할 때마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스물네 시간을 아껴가며 살고 싶다.
    작년에 나이 지천명을 넘기면서 유언을 미리 정리해 두었다. 장례식은 따로 치르지 말고 다비茶毘만 할 것이며, 유골은 평소 좋아했던 벚나무 아래 뿌릴 것, 절의 나무를 자르지 말 것...이런 식으로 죽음을 슬퍼할 지인들에게 남길 말을 작성해 놓았다. 그리고 유골 뿌린 나무아래에 작은 표석을 하나 세워서‘ 비구比丘 현진 머물다 간 곳’이라고 적어줄 것을 당부했다.
    한때 나는, 묘비명에‘살아보니 별거 아니더라!’라고 메모해 두었는데 이것 또한 후인이 기억해 주면 좋을 일이지만 새겨주지 않아도 서운할 일은 아니다. 『 직지』를 편찬한 백운 화상 자신도 임종을 앞두고‘화장한 후 재를 만들어 사방에 뿌릴지언정 시주자의 땅을 범하지 말라.’고 부촉했다. 고려의 손꼽히는 선사였음에도 땅 한 평이라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말 것을 하명했는데 내가 그보다 더 뛰어날 수 없으니 반 평의 땅도 아깝다. 그러므로 재를 만들어 나무 그늘에 뿌려주면 여한이 없는 것이다.
    최후의 순간은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행동의 결정체다. 이렇게 따진다면 ‘ 평생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대답이‘어떤 모습으로 죽는가?’ 이다.
    이런 점에서 호탕하게 최후의 말을 남기고 일곱 걸음으로 생을 마감했던 지한 선사의 열반불사를 내 생애 마지막 장면으로 옮겨오고 싶다. (현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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