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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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서천의 일곱 현녀가 주검이 널린 숲에서 놀다가 주검 하나를 보았다.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시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시신은 여기에 있는데, 사람은 어느 곳으로 갔나”
    여러 현녀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각기 깨달았다. 감동한 제석 천신이 꽃을 뿌려 공양을 올리면서 말하였다.
    “현녀들이여,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평생 대 주겠다”
    “우리 집에는 의복, 음식, 와구, 의약품과 일곱 가지의 보물들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세 가지 물건이 필요하니, 첫째는 음과 양이 없는 땅 한 뙈기, 둘째는 뿌리가 없는 나무 한 그루, 셋째는 불러도 메아리가 없는 산골짜기 하나입니다.”
    제석천신이 “다른 필요한 것은 내가 다 가지고 있으나 이 세 가지 물건은 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고 하자 현녀가 말하였다.
    “그대는 이러한 물건이 없으니 어찌 사람을 제도할 줄 알겠는가.”
    듣던 제석천신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날의 사람들이라면 어땠을까. 숲에서 놀다가 갑자기 버려진 시체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일단 외마디 비명 먼저 지르고 볼 것이다. 일곱 명의 현명한 여인들은 죽은 시체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 다만 멋진 질문을 던진다. ‘시신은 여기에 있으니 사람은 어디에 갔는가?’이 멋진 질문이 제석천신을 감동시킨다. 죽어 고꾸라진 것은 그‘시신’일 뿐이지 그 사람 자체가 아님을 포착하는 여인들의 혜안이 제석천신을 감복시킨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시체 앞에서 초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살아있는 것은 꼭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교조를 학습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의 죽어있는 모습을 견디지 못한다. 멀쩡한 음식을‘음식물쓰레기’로 분류하고, 조금만 시들거나 빛이 바래도 ‘상품성이 떨어진다’ 며 채소를 버린다. 우리는 살아있는 것들은 늘‘최고의 모습’으로 단정하게, 멋지게, 생동감 넘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살아 있는 것들의 죽어감을 발견하지 못한다. 살아있었던 것들의 죽어 있음을 견디지 못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죽어야 함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삶의 과정 하나하나, 죽음의 과정 하나하나를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기에 우리는 그 무엇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온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삶의 과정이 곧 죽음의 과정임을 머리가 아닌 심장으로 감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어가는 것들의 비명 소리에 좀 더 따스한 마음으로 귀 기울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삶의 어떤 빛나는 순간이든 부지런히 죽어가고 있는 우리 자신의 피할 수 없는 운명에조차 못내 감사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얼마 전 길을 걷다가 죽은 새 한 마리를 발견했다. 누군가 괴롭히거나 해를 입혀 죽은 것이 아니라 자연사한 모습이었는데도, 나는 그 작은 새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죽은 새는 무서운 것’이라는 내 고정관념이 그 새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게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 새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을 텐데. 조금만 더 지혜로웠더라면 그 새에게 노래 한 곡이라도 불러주었을 텐데. 좋은 곳으로 가라고. 아무 후회도 없이, 어떤 미련도 없이, 온 힘을 다해 날아오르다 길 위에서 죽은 네가 아름답다고, 위로해주었을 텐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고, 아무것도 뒤돌아보지 말고, 그저 네가 가던 길을 조용히 날아오르던 네 마지막 한숨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을 텐데.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죽은 새의 널브러진 시체와‘새의 마음’을 구분하는 혜안이 없었던 것이다. 허둥대는 마음, 기피하는 마음, 손해는 피하고 이익은 취하는 마음으로는 그 무엇도 깨닫지 못한다. 깨달음은 통째로 온다. 잘 모르지만, 그것만은 알 것 같다. 통째로 오기에 어떤 건 취하고 어떤 건 버릴 수가 없다. 쓴맛을 버리고 단맛만 취하려는 분별심으로는 지혜의 ‘ 꼬리’조차 밟을 수가 없다. (정여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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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광효 안 선사가 수련하던 중, 두 스님이 법당 난간에 의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천신이 호위하였으나 나중에는 악귀가 침을 뱉고 그 스님들의 발자국을 쓸어버렸다. 스님들의 대화가 불법에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세상사를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광효 안 선사는 이때부터 세상일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광효 안 선사는 법 이야기를 나누다가 삼천포로 빠져서 결국은 악귀惡鬼 귀耳 에도 거슬릴 정도로 쓸데없는 사사로운 이야기만 나눈 어리석은 중을 일깨우기로 마음먹는다. 그러기 위해서 평생토록 세상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침묵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우수한 언변보다 더 탁월한 언변이었다는 것을 ‘돌아가시고 화장을 하니 혀가 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며 유연하기가 마치 붉은 연꽃과 같았다.’는 전설적인 말씀으로 알 수 있다.
    『 신약성경』을 잘 읽어 보면 나사렛 사람 예수 또한 말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행동으로써만 가르치신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분의 가르침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아주 많다. (서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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