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장 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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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고령신찬古靈神贊, 생몰연대미상 선사는 어릴 적에 복주 대중사大中寺의 계현戒賢에게 출가하였다. 그 후로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행했는데 백장白丈선사의 문하에서 몇 해 동안 머무르면서 깊은 진리를 깨달았다. 『직지』에서 인용한 글도 바로 그 내용이었다.
    그의 은사 계현戒賢법사는 그 절의 강사講師인데, 제자인 신찬이 훌륭한 강사가 되어 자기의 뒤를 이어줄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경전을 가르쳤다. 신찬은 타고난 현명함과 꾸준한 노력으로 오래지 않아 스승의 실력을 능가하게 되었다. 불교 경전을 어느 정도 섭렵한 신찬은 참선을 통해 생사해탈의 큰일을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신찬이 자신의 간절한 뜻을 스승에게 말씀드렸으나, 스승은 냉담한 반응만을 보일 뿐이었다. 더이상 헛되이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한 신찬은 몰래 도망하여 백장(百丈:叢林을 처음 열고 禪宗의 규칙을 제정하였다.)의 문하로 들어갔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불철주야하며 피눈물나는 정진을 거듭한 신찬은 마침내 견성오도見性悟道하였다. 깨달음을 얻은 그는 처음 자신을 입문시켜 불경을 가르쳐 주고 지극히 아껴준 계현 법사의 은혜를 생각하고는 고령사로 돌아왔다.
    “너는 나를 떠나 여러 해 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래, 그동안 무슨 소득이라도 있었느냐?”
    계현 법사는 신찬이 돌아온 것을 반갑게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힐책하였다.
    “아무것도 얻은 바가 없습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세상의 모든 법은 가짜 존재이므로 한 물건도 집착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인데 무슨 얻은 것이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을 알아듣지 못한 스승은 신찬이 허송세월만 하고 돌아왔다고 생각하였다. 신찬에 대하여 실망한 스승은 절에서 천한 일이나 할 것을 명하였다. 신찬은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나무를 하고 마당을 쓸었으며, 공양주를 도와 물을 긷고 불을 때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하루는 계현 법사가 신찬에게 목욕물을 준비시키고 등을 닦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신찬은 스승의 말씀대로 등을 깨끗이 닦아드리고 나서 스승의 등을 가볍게 치면서 중얼거렸다. “법당은 참 좋은데,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好好法堂 佛無靈驗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흘끗 돌아보았다.
    “부처가 영험은 없어도 방광放( 光)은 할 줄 아는구나.”
    佛雖無靈 且能放光
    뒤돌아보는 스승을 향하여 신찬은 꺼리지 않고 다시 중얼거렸다. 그러자 스승은 신찬이 심상한 인물이 아님을 언뜻 짐작하였다.
    계현 법사는 언제나 창 아래 놓인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경전을 읽곤 하였다. 어느 따뜻한 봄날, 꿀벌 한 마리가 방안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려고 애쓰고 있었다. 꿀벌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나가면 되는 데도 꼭 닫힌 창문에 몸을 부딪치며 헛된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 모양을 묵묵히 지켜보던 신찬이 스승에게 들리도록 게송을 지어 읊었다.

    “활짝 열어놓은 저 문은 마다하고 굳게 닫힌 창문만을 두드리는구나.
    백 년 동안 옛 종이를 뚫으려 한들 어느 때에 벗어나길 기약하리오.”
    空門不肯出 投窓也大病 百年鑽古紙 何日出頭期
    게송을 조용히 들은 스승은 보던 경전을 덮고 묵묵히 신찬을 바라보았다.
    “나는 네가 허송세월만 하고 돌아온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구나. 너의 태도가 범상치 않으니 그동안 누구의 문하에서 어떤 법을 배웠는지 말해 보아라.”
    “스님, 무례한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실은 그동안 백장선사 법좌에서 불법의 요지를 깨닫고 왔습니다. 돌아와 보니 스님께서 참 공부에는 뜻이 없으시고 여전히 문자에만 골몰하고 계신 것이 민망하였습니다. 제가 권하여도 들으실 리 없는지라 말씀을 누차 드려 참다운 발심을 촉구하였던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오, 기특한 일이다. 비록 나의 상좌이긴 하나 공부로는 나의 스승이니 지금부터 백장 스님을 대신하여 나에게 불법을 설법하여 다오.”
    계현 스님은 북을 울려 대중을 모이게 한 뒤에 법상法床을 차려 설법하게 하였다. 신찬은 위의를 갖추고 엄숙하게 법상에 올라 대중을 향하여 설법을 시작하였다.

    신령한 빛이 홀로 빛나 인식의 세계를 벗어났으니 참모습이 드러나 문자에 걸림이 없도다. 마음은 물들지 않고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다만 망령된 인연만 여의면 곧 부처니라.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露眞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是如來

    법상 아래서 제자인 신찬의 법문을 조용히 듣고 있던 계현 스님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내 어찌 늘그막에 이와 같이 지극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으리라 짐작했으리오.” 이리하여 계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보다가 제자로 말미암아 허공의 밝은 달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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